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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廢鑛) <2>
2018년 11월 04일(일) 15:56 [경산신문]
 

 
ⓒ 경산신문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석양이었다. 바닷물이 병원 앞 축대까지 밀려와서 출렁댔다. 폐광의 건조물이 밀림의 거인처럼 햇빛을 등지고 이편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 때는 병원 뒷산 전체가 채광으로 붐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하고 질 좋은 코발트가 생산됐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만주사변 시기부터 이 산에서 채굴을 시작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에 가장 성업을 이루었다. 패전과 함께 일제가 물러가자 절로 광산의 문도 닫혔다. 해방 후 광산에 대한 재조사를 시행한 미군정이 경제성 없다는 결론을 내린 다음부터는 인적 끊긴 폐광으로 버려졌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광산에는 이제 몇 개의 덩치 큰 건물과 광석을 채우던 콘크리트 웅덩이 그리고 수도 헤아릴 수 없는 갱도들만 남겨졌다.

그런데 이들 갱도만큼은 폐광 이후에도 그 쓰임새를 온전히 잃지 않았다. 우선 마을 아이들의 스릴 넘치는 놀이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농부들의 버섯재배에도 요긴하게 쓰이곤 했다. 그뿐인가. 6.25 동란이 발발하고 전선이 남쪽으로 밀려올 무렵, 이 깊고 어두운 동굴들은 무법의 처형장으로 변신했다. 적에게 동조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인사들을 사전에 처단한다는 이유로 숱한 사람들이 이곳에 끌려와 목숨을 잃었다. 갱도 가득히 사람들을 채워 넣고 무차별로 총을 난사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총탄을 맞고 죽은 이들보다 굴 안쪽으로 달아나다가 캄캄한 수직 갱도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더 많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갱도의 입구는 흙벽으로 봉해졌다. 이후 많은 인골들이 수습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버려지고 흩어진 것들이 더 많았다. 물론 이 뼈들은 전란 때 남겨진 것만은 아니었다. 일제 때 광산에서 일하다가 일인의 학대로 죽은 사람들의 것도 이 음산한 굴속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비극을 잘 알고 있는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광산에 오르기를 꺼렸다. 그리고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들 뼈마디와 조각들은 스스로 원한의 징표가 되는 양 밤마다 푸른빛을 뿜으며 폐광 근처를 굴러 다녔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도깨비불이었다. 날씨가 약간 궂거나 안개라도 끼는 밤이면 산 아래 위가 온통 도깨비 천지가 된 듯 푸른 불길이 흘러 내렸다.

나는 창 너머로 폐광의 낡은 건물들을 보다가 다시금 맹 씨, 장 씨 일행을 떠올렸다. 폐광의 어둔 갱도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줄 구원의 통로가 되리란 어치구니 없는 믿음으로 야행을 감행하는 기괴한 그들의 모습을 그려 보았던 것이다.

김 씨 말대로, 그들은 이미 병에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미치광이 짓거리마저 서슴지 않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날로 발전한다는 현대의학도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되질 못했다. 그들은 벌써 입원기간만도 다들 3년을 넘기고 있었다. 시달릴 대로 시달리면서도 지금까지는 끈질기게 버텨 온 셈이었다. 그러나 매월 정기 검진에서 나타나는 병증은 조금도 나아진 바가 없었다. 되레 악화돼 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세기적인 발명이라는 약들마저 그들에게는 아무런 효험을 발하지 못했다. 그들이 병원을 찾은 시기가 너무 늦었던 것일까. 약물 치료를 제 때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일까. 이런 판단은 소심한 나와 이론만 따지는 의사들 그리고 기계적으로 일하는 간호사들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서대문 로터리 근처의 한적한 인도에서 내뱉은 한 덩이의 피 묻은 가래로 인하여 병원을 찾았던 나는, 맹 씨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에 비해 너무도 재빨랐다. 언제부터인가 있던 증세...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와 어깨가 천근이나 되듯 무겁고, 전신은 식은땀에 적셔져 있고, 선 잠결, 무수한 악몽, 가신 듯 없어진 식욕, 한낮이면 분노처럼 치밀어 오르는 끈끈한 미열, 권태... 결핵의 초기 증세인 이러한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설마 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피범벅의 가래를 보곤 직감했다. 내가 그 몹쓸 병에 걸렸다! 한 순간 내 뇌리를 때리고 지나간 의식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가래를 살피려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다가 나는 자지러질 듯이 기침을 했다. 햇빛이 눈이 시렸다. 사방이 온통 흰 빛깔로 변했다. 한꺼번에 가시는 사물들의 이름과 의미들. 행인, 상점, 포풀러, 극장, 다방...

엑스레이 사진을 살피고 난 의사는 미간을 접으며 입원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빼빼 마른 의사가 치켜든 막대 끝에 집힌 부유스름한 내 흉부 사진을 바라보다가 이제부터 이 의사가 나의 생명에 직접 관여한다는 생각에 수치심을 가졌다.

꼭 6개월 전, 대학 3학년 과정을 끝낸 겨울방학 때의 일이었다. 나는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찬 대기로 가지를 뻗고 있던 이 요양소로 옮긴 후 봄을 맞고 창밖의 아카시아 잎들이 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커다란 생명력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 무렵 시례를 만났다. 봄 햇살이 부드럽게 퍼지던 날, 시례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환자들을 위문하러 왔다. 꼬마들이 병실을 돌아다니며 진달래꽃을 아름아름 꽂아 주었다. 나는 그때 햇살처럼 밝게 웃는 시례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웃음이 무척 밝네요. 좋은 일이 있으신가...?”
“그래요? 봄이잖아요.”
“꽃들이 싱싱해 보여요. 어디서 꺾은 것인가요?”
“저기 봐요. 광산이 보이죠? 요즘 저쪽에 가면 진달래꽃 천지예요. 저기서 꺾어 온 것들이에요.”
“교직에 오래 계셨어요?”
“그렇게 보여요? 제가”
“약간”
“이제 두 달밖에 안 된 풋내기인걸요. 졸업하고 좀 쉬었어요.”
“아이들이 좋아하겠어요.”
“왜요?”
“아직 신선해서”
“아직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실례했습니다.”
“선생! 같이 대학 나왔다고 끼리만 얘기하기요? 우리 늙은이 하고도 얘기 좀 합시다.”

옆 침대의 김 씨가 끼어들었다. 그 말은 못 들은 양 하고 시례가 물었다.

“졸업하셨어요?”
“한 학년 남겨 놓았어요.”
“무슨 과?”
“무슨 과로 보여요?”
“생물학과”
“피...”
“경제과?”
“아니 영문과”
“그럴 거예요. 일부러 그래 봤어요.”
“저 김 씨 아저씨하고도 얘기해 보셔요.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해주셔요.”
“그래야죠. 전 아무래도 나이 잡수신 분들이 더 좋더라. 그리고 산책하실 때 학교 쪽으로도 한 번 오세요.”

그 다음 주일, 시내 한 다방에서 우리 환자들의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심심하던 차에 나는 ‘꽃’이란 제목으로 아이들이 꽂아놓고 간 진달래꽃을 그려 내었다. 그 다방에서 다시 시례를 만났다. 내 그림이 마음에 든다는 그녀에게 나는 전시가 끝나면 그림을 선물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림 덕으로 몇 차례 더 시례를 만났고 또 친해졌다. 마침내 나는 결핵보다 더 큰 병을 가지게 되었고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병원에서나 바깥에서 나의 ‘피앙새’가 되었다.
저녁 산책시간이면 나와 그녀는 늘 같은 길을 걸었다. 멀리 화력발전소가 보이고 기름이 뜬 탁한 바닷물이 출렁대는 해안의 둔덕길로 해서 조그만 고개를 오르고 폐광의 유물이 도열하고 있는 산 아래 국민학교까지 가는 길이었다.

학교에도 들렀다.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는 운동장을 지나면 곧바로 검은 판자벽을 가진 교사였다. 교실마다 닳아서 번뜩이는 책상들이 맞대어 있고, 1의1, 2의3, 5의2... 문패를 보면서 긴 복도를 걷기도 했다. 교무실 앞 화단에 백엽상과 비둘기 집이 있는 작은 국민학교는 나에게 어린 시절에 가졌던 설렘과 서성임을 다시 되돌려 주었다.

그녀는 폐병장이와 사귄다는 주위의 수군거림과 눈총을 아랑곳 않고 헌신적으로 나를 간호해 주었다. 내 결벽증으로, 기침을 할 적이면 애써 그녀가 내 곁에 오는 것을 말리곤 하는데도 그녀는 굳이 제 얼굴을 내게 들여 밀기 일쑤였으며 어느 때는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자기에게도 병균을 옮겨달라고 울먹이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이 전신이 찌들고 허허로운 나와 분필가루 속에서 하루하루를 시달리는 그녀에게 주어진 막다른 몸짓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 3편은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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